꽃의 이름, 뭔가 이름에서부터 코믹하고 발랄한, 만화는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읽으면서도 먹먹했고, 다 읽고난 후에도 먹먹한 내용이었다. 그것도 순정만화라는 타이틀을 달고, 이 만화는 잔잔하면서도 먹먹한, 아련하고 가슴 저미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쓸데없이 내용 질질 끄는 것을 싫어하는데, 이 만화는 너무 내용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조금만 더 내용을 풀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그런 내용이다.
내용 자체는 특별나지 않다고, 하고 싶지만 조금은 특별하다. 뻔하디 뻔한 내용은 아니다. 설정 자체가 어둡다. 그렇지만 내용 전체가 우울하거나 암울하거나 그렇지는 않다. 다만, 잔잔하고 조용조용하면서 마음을 적셔온다.
사실, 이 만화는 줄거리라는 걸 말하는 게 어렵다. 직접 봐야 한다. 정말 강추하는 만화다. 아쉽게도 이젠 서점에서 살 수 없지만, 중고라도, 하다못해 책방에서라도 꼭 읽어보길!! 내용을 쓰다보면 스포를 한껏 하게 되지만, 알고 봐도 그림과 함께 보는 것은 또 다르기에... 꼭 보길!!
부모님의 일 때문에 오랜기간 떨어져 살았던 초코(고1인지, 고2인지...)는 돌아온지 한 달만에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목소리와 삶의 의미마저 잃어버린다. 친척 집과 아버지의 친구집을 전전하다 아버지의 사촌 동생인 12살 위의 소설가 케이의 집에 살게 된다. 그곳에서도 여전히 말이 없고, 밥도 안 먹는 나날이 늘어나고, 케이는 초코에게 제대로 살라며 화를 내고, 집에서 살게 하는 대신 밥과 청소를 하라고 한다. 그리고 남는 시간이 있다면 정원에서 꽃을 키워보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도 보내주고, 살 집도 마련해준다고 말한다.
정원에서 꽃을 키우며, 예전의 그 모습은 찾을 수 없을만큼 밝게 웃는 초코. 케이와의 생활도 순탄하다. 케이의 생활방식에 적응하여, 말하지 않아도 케이가 원하는 것을 딱딱 가져다주는 초코다.
케이는 말이 없고 무뚝뚝한 소설가로, 집필을 하면 몇 날 며칠이고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면서 어느 새 초코의 졸업해가 된다. 초코는 케이의 대학 동창이자 친구인 편집자(앗, 이름이 생각 안 남!! 조연이지만 친구를 생각하고 둘 사이를 이어주려 하는 중요 인물! 이 작품의 유머를 담당한달까?)를 통해 케이의 신작 "화명(꽃의 이름)"을 읽게 된다. 평소 케이의 소설이 너무나 어둡고 우울해서 끝까지 읽지 못했던 초코는 화명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 기존에 써온 케이의 소설과는 다른 색깔의 책이었기 때문이다.
화명은 어둠 속에 내내 혼자 있던 청년이 실어증에 걸린 소녀를 사랑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었다. 그러니까 자신과 초코의 이야기를 소설화했다고 할 수 있는데, 초코가 화명을 읽었다고 하자 케이는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며 말한다. 그러나 초코는 케이의 마음을 알고, 물론 초코 역시 케이를 사랑하고 있었기에(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그렇지만 만화임에도 한 편의 소설을 보는 느낌이 든다), 졸업 후에도 집을 떠나지 않고 함께 산다.
그러나 둘의 사이는 전혀 좁혀지지 않는다. 여전히 표현하지 않는 케이, 그러나 케이의 담당 편집자인 친구는 케이가 예전 모습과 다르다는 것을 안다. 암울한, 자신의 어둠을 주변 사람까지 끌어들이는 그 어둠을 곁에서 지켜주지 못하고 떠난 죄책감을 가졌던 친구. 케이의 무뚝뚝하고 미운 소리에도 케이에게 자주 온다.
단 4권의, 짧다면 짧은 만화지만 그 안에 케이의 어두운 마음이 함축적이고 압축적으로 나와 있다. 만화가 끝날 때까지 초코는 케이의 아픔을 모른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말해주지 않을까? 어렸을 적, 케이는 뼈대 있는 집안의 손자이지만 엄마와 함께 쫓겨난다. 엄마는 병을 얻고, 엄마를 곁에서 지킬 것이라 하지만 자신의 형이 쫓겨난 이유를 말해준다. 바로 케이가 자기의 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것. 엄마가 자신의 시아버지와 불륜을 저질러서 케이를 낳은 것이라는 것. 케이는 이 말에 상처 입고 엄마에게 더럽다고 하고, 그날 밤 엄마는 결국 죽고 만다. 약을 먹지 않은 채.
케이는 자기가 엄마를 죽였다는 그 죄책감에 죽으려고 하는 등, 세상과의 문을 닫고 산다. 이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 간헐적으로 스스로를 계속해서 상처 입힌다. 자신은 사랑하거나 사랑 받을 자격이 없고, 계속 상처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뿌리 깊은 아픔은 케이를 어둠 속에 가둔다.
그런 케이에게 케이와 비슷한, 부모를 잃고 말도 잃고 삶의 의미마저 잃은 것처럼 보이는 초코가 나타난 것이다. 처음에는 맡지 않으려 했으나 초코의 그런 모습을 보고 케이는 초코를 맡게 된 것. 그리고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조금씩 어둠 속에서 나오게 되었지만 초코를 사랑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멀리 밀어내려 한다.
그러다 만난 첫사랑이라고 해야 할지, 여자를 만나고(그 여자는 편집자 친구가 사랑하는 친구였다) 케이는 초코를 떠나 다시 어둠 속에 잠식한다. 편집자 친구는 그런 모습을 예전에 봤었기에(그때 결국 그런 그의 곁에 있지 못하고 떠나 버린 일 때문에 케이의 곁에 오지 못하고 있다가 화명을 보고 다시 곁에 온 것이다. 그리고 다신 그를 떠나지 않겠다고 한다. 하아~ 진짜 멋진 친구다!!!), 초코에게 그가 어쩌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케이는 초코가 자기 없어도 강하게 잘 살 것이라고 편집자 친구에게 말했었다. 실어증에서도 헤어나오고 정원의 꽃도 너무 예쁘게 키우고, 자신도 너무나 예쁘게 웃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초코는 떠난 케이 때문에 다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지낸다. 학교도 빠지고(대학교. 책 읽는 서클이던가? 암튼 그런 곳에 들었는데, 그곳의 어떤 소심한 남자애가 초코를 짝사랑한다. 초코는 거절하지만. 초코에겐 케이가 없는 삶이란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런 모습을 본 편집자 친구는 케이를 찾아가 당장 돌아오라고 말한다. 초코는 강하지 않다고, 너 때문에 망가졌다고.
이 말에 돌아온 케이. 사랑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장면이 분명 있지만(있었던가? 한번은 있었던 것 같은데.. -_-a), 그보다는 행동 같은 것을 통해 초코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 다시 평온한 일상이 된 것 같고, 케이의 마음을 확실히 알게 된 초코지만(자길 떠나지 말라는 케이의 고백. 고백인데도 아팠다.) 오히려 더 외롭다.
그러다 케이는 우연히 형을 만나게 되고(직접적으로 나오진 않았지만 죽은 엄마가 형에게도 친엄마일 듯! 그러니 모진 소리를 하는 형임에도 그 역시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의 엄마가 할아버지와 불륜으로 동생이라고 해야 할지, 작은 아버지라고 해야 할지... 하는 존재를 낳았다는 것은 상처가 됐을 터. 머 추측이지만~), 케이에게 모진 소리를 한다. "네가 엄마를 죽였다"인가, 아무튼 이런 비슷한 늬앙스의 말을 하고 케이는 다시 어둠 속에 들어간다.
그날 집에 오자마자 초코를 안으며 자기 곁을 떠나지 말라고 한 케이. 그때 울리는 전화벨 소리. 초코는 전화를 받아야 한다며 그를 떠나 전화를 받고(그 전화는 초코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내용), 장례 준비를 한다. 케이는 초코가 전화를 받는 사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선 나오지 않는다. 초코에게 자길 떠나라고 한다. 결국 케이는 초코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모른 채 다시 어둠에 침잠한다. 초코를 짝사랑하는 남학생이 집으로 찾아와 케이에게 멍청한 사람이라고 했던가, 암튼 그렇게 소리치고 초코를 데리고 나온다.
그 말에 다시 정신을 차리는 케이. 초코는 자기가 케이를 떠났기에 케이가 그런 것이라며 다신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전화를 받았을 뿐이지만, 상황상). 다시 절절히 고백하는 케이와 초코. 그렇게 다시 평화로운 일상을 맞는 듯한 둘이지만, 좀더 자신을 표현하는 초코.
그렇게 끝이 난다.
둘이 결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초코가 케이의 아픔을 온전히 다 알게 되어 그를 빛으로 완전히 나오게 하지 않을까 싶다. 늘, 항상, 그 둘이 그렇게 정원의 꽃을 보며 잔잔하고 조용히 사랑하지 않았을까?
글도 예쁘고, 그림도 예쁘다. 먹먹한 느낌이 드는 만화다. 부모를 잃은 슬픔에서 케이 덕분에 빠져나왔던 초코에게 케이는 없어서는 안 될, 다시 잃어버릴 수 없는 존재다. 케이 역시 자신은 행복하면 안 되고, 상처 받으며 살아야 한다고 살아왔지만 초코 덕분에 아픔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렇게도 그릴 수 있구나. 케이가 답답하면서도 그럴 수 있겠구나, 하면서 연민이 생기고, 초코의 한결 같은 마음에 마음이 뭉클해지고, 사랑의 다양한 색깔들 중 이런 색깔이 화려하거나 밝지 않아도, 더 깊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는 곁에 조용히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는 것이니까. 무수히 많은 말보다 작은 몸짓이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으니까.
3권의 표지가 바로 편집자 친구, 4권의 표지가 짝사랑 남이다.
제목
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