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 세편은 전부 보지 않았다.
내게 익숙한 배트맨은 아마 팀버튼 감독의 배트맨일 듯. 어렸을 적에 처음 접한 배트맨 영화이기도 했으니까 더욱 그랬을 것이다. 팀버튼의 배트맨 시리즈(배트맨1, 2, 배트맨 포에버, 배트맨 앤 로빈)는 다 보았던 것 같다.
그런 내게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배트맨 리턴즈, 다크 나이트,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보기도 전에 암울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명작이다, 꼭 봐야 한다는 말과 함께 우울하고 암울하다, 팀버튼의 배트맨을 생각한다면 보지 않는 게 낫다, 등등등의 말들...
배트맨 비긴즈가 개봉할 당시의 내 상황과 암울하다는 영화의 평만을 보고 안 보게 된 것이 10년이 된 지금까지도 이어졌다. 그러다 우연히 배트맨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를 보지 않았다는 것에 조롱을 받으며(팀버튼의 배트맨은 쓰레기라는 다소 과격한 말과... 배트맨 원작 만화를 보지 않은 내게, 원작에 가까운 것이 놀란의 배트맨이라며 배트맨의 가치관이나 원작의 세계관을 제대로 알고자 한다면 놀란의 배트맨을 봐야 한다는 말을 연이어 듣는 배트맨 폭격(ㅋㅋㅋㅋ)을 당하고) 왠지 모를 억울함, 궁금함 등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 중 비긴즈를 접했다.
결론은, 재미있었다. 암울하다는 느낌도 그렇게 많이 받지 못했고...
비긴즈의 어떤 정보도 모르는 채로 봤는데(게리 올드만이 나온다는 것 하나만 들었을 뿐), 모건 프리먼, 마이클 케인, 리암 니슨~ 등이 나오다니~ 그 놀라움이 더 좋았던 듯...
특히 영화 초반에 리암 니슨이 한 대사 중,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지,란 생각을 한 부분이 있었다. 영화 후반부가 되어서야 리암 니슨의 진짜 존재를 알게 되고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게 되어 초반의 좋았던 감정이 좀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그 대사, 나는 좋았다. 리암 니슨의 명대사가 많았던 듯 싶다. ㅋㅋㅋ
리암 니슨이 연기한 듀커드가 이런 말을 한다.
"분노는 큰 힘이 되기도 하지만 분노를 의지하면 자신은 파멸한다."
"훈련보다 중요한 것은 싸우겠다는 의지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
"사회의 관용이 악당을 만든다(범죄를 부추긴다고도 하고 번역에 따라 좀 다르겠지만...)"
분명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겠지만, 나는 사형제를 지지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저 말이 기억에 남을 수도 있을 터.
어렸을 적에는 사형제 폐지에 찬성했었다.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하나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빼앗는다는 것은 그 나쁜 놈과 같은 급이 되는 것이라고 여겼었다.
지금은 아니다. 하나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강제적으로 빼앗는 부분은 있지만 그것은 제도 안에서 약속되어진 법칙이고 그 법칙에 희생되고 싶지 않으면 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된다. 물론 어떤 부분에서는 위험할 수 있는 생각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사형을 언도 받은 사람(오죽하면 사형을 언도 받았을까...)에게 그 법칙을 실행하는 것에는 찬성이다.
사람을 마구 죽여도 잡히지만 않으면, 아니 잡혀도 자신이 죽인 사람들보다 길게는 몇 십 년을 살아갈 수 있는데(갇혀 있어도 숨은 붙어 있는 것!!) 과연 죄 짓는 것을 무서워할까? 실수가 아닌, 한 명 이상의 사람 생명을 강제로 빼앗은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강제로 빼앗기는 것에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함무라비 법전처럼 강력한 사법체계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적어도 죄를 지었으면 그에 합당한 벌을 제대로 받아야 한다는 생각 뿐... (영화 속 리암 니슨의 생각처럼 극단적인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듀커드가 브루스에게 살인자(마을 농부이나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를 죽이라고 시키는 장면이 있다. 그때 브루스가 그 농부를 죽이길 원했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기에 당연히 아니다. 죽이질 않길 원했고, 실제로 영화에서도 브루스가 그를 죽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런 게 배트맨이 추구하는 어떤 가치관의 하나(나중에 리암니슨, 악당 듀커드도 직접 죽이지는 않는...)가 아닐까 생각한다. 결과적으로는 살인자도 죽이게 되었고 리암 니슨도 마찬가지(브루스의 직접적인 행동은 아니었음에도)였지만.
나는 여기서 다른 생각이 드는 것이, 자기 손에 직접적인 피를 묻히지 않는다고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냐, 그건 아니라는 것. 살인을 청부한 사람도 처벌 받는 시대다. 누군가를 죽게 만들었다면 살인방조죄라는 벌도 있듯이. 물론 브루스는 악당을 처벌한 것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직접 죽이지 않는 것이 속죄를 받을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듀커드는 이미 악으로 물든 도시(고담시)는 싹 없애버리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저 위의 리암 니슨의 대사와도 어느 정도 통하는데, 그래서 그는 악당이 되었고, 실제로 그것을 실행하려고 한다. 배트맨은 이를 저지했고. 브루스가 그 살인자가 된 농부를 죽이지 않은 것처럼, 배트맨은 아무리 악으로 넘쳐나는 도시일지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단 1%의 희망의 싹?이라고 해야 하나?)이 있는 한은 도시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스승이었던(결과적으로 배트맨이 될 수 있도록 만든) 듀커드를 저지하게 된다.
이런 식의 양분법이라고 하기엔 뭣하지만(아, 철학 공부 좀 해둘걸~), 악으로 물든 곳은 결국 다 없애야 그게 전체적인 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거의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악당으로 나오는 것 같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없는 사람들까지 그 희생양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대다수 주인공이 이런 생각을 가진 듯)의 시각으로 나뉘어진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들이 꽤 있다.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 vs 한 사람의 희생이라도 있다면 그건 옳은 게 아니다
특히 영웅물에 이런 가치관이 많이 보이는데, 싹 쓸어버리고 새롭게 도시가 만들어진다고 그 도시가 선한 천사의 도시라도 될까? 고담시가 악으로 물들었다고 해도 다시 새롭게 지어진 고담시가 그렇게 되지 말란 법도 없다.
이건 결국 인간 존재에 대한 것으로 옮겨간다. 인간 자체가 선과 악을 모두 가지고 있고,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선만 있을수도, 악만 있을수도 없다. 그래서 절대 선이라는 목적에 맞도록 행하는 악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인간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악당도 인간이기에... 스스로가 인간 멸망을 부르짖지 않는다면, 지구만 덜렁 남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듀커드의 가치관은 굉장히 옳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란 존재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고. 결국 듀커드의 가치관에 따른다면 남아나는 도시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악에 지배당하는 것처럼 보여도 나서지 않는, 드러나지 않는 선한 사람들도 있다. 고담시에도 분명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 뿐이고.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무기력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산다고 그게 악하다고 할 수 있을까? 너도나도 배트맨처럼 영웅이 된다면 그것 역시 사회를 위한 일이 될까?
영화 속에 이와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브루스 웨인 집안의 충실한 집사가 브루스에게 따끔하게 충고하는 말이다.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면 그저 자경단일 뿐입니다."
브루스가 고담을 지키겠다고 배트맨이 되었는데, 어렸을 적 친구이자 계속 좋아했던 레이첼(케이티 홈즈)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도시를 엉망으로 만들었고(경찰차를 피하며 도로 이곳저곳에 피해를 주게 된 것. 원하진 않았겠지만~) 그것이 뉴스에도 나온 것을 보고 한 말이다.
그렇다는 것은 배트맨은 단순한 자경단이 아니라는 말도 된다. 어쨌거나 영화에서 보면 마지막에 악당을 처리하는 것은 경찰에게 맡기니까. 최소 직접적으로 응징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도시에 피해를 주지도 않았다. 경찰 입장에서는 달리 보였을지라도...
고담시의 영웅 배트맨은 나타날 수밖에 없는 필요악이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악이라 함은 배트맨은 자경단이 아니라고 해도 사법체계 안의 정당한 법집행관은 아니니까 하는 말이다(사법체계 안의 법집행관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존재의 당위성은 그래야 하니까). 그리고 모두 쓸어버릴 수는 없으니 하나하나 없애서 조금씩 변하도록 만들어야 하니까.
다시 위에서 하던 얘기로 돌아와서~ 결국 악당의 논리는(악으로 물들었으니 싹 없애야 한다) 완벽하지 않은 것이다. 보기 싫으니 없애는 것뿐. 그것의 근본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 악당이 아닌 많은 시민들(비록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더라도)을 죽인 대가치고는 말이다. 보기 싫으니(악에 물들어) 없앤다는 것이 그저 피하는 게 아니고 뭘까? 듀커드(리암 니슨)는 영화 초반에 브루스에게 무술 등을 가르치면서 두려움을 극복하라고 한다. 피하지 말고 이겨내라고. 정면 돌파하라고.
그런데 듀커드는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 악으로 물든 도시를 없애는 것은 정면 돌파가 아닌 것. 그저 무수히 많은 악당을 계속해서 하나씩 없앨 수는 없으니 다수의 많은 악당들이 있는 도시를 없애자는(어떻게 보면 훨씬 경제적인) 생각을 한 것일 뿐이다. 거기서 파생되는 악당이 아닌 사람들의 목숨은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래서 악당은 악당일수밖에 없는 듯...
브루스의, 희망이 있다면 다시 세우면 된다는 논리가 절대적인 것은 분명 아니겠지만 최소한 악으로 물든 도시에 정면돌파는 하는 것이다.
레이첼이 브루스에게 한, 정의 실현은 조화를 위해서지만, 복수는 자기 만족을 위해서라는 말과도 통하는 것 같다. 듀커드는 자기 아내를 죽게 만든 그 악, 악을 만든 사회에 대한 복수를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일 뿐. 진심으로 악에 물든 도시를 없애 선을 행한다는, 인간 사회의 조화를 위한 생각이나 행동은 아니었던 것.
그것은 레이첼이 브루스에게 자신을 나타내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라고 했던 말과도 마찬가지다. 듀커드의 생각은 선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의 행동을 보면 그건 악일 뿐이다. 절대 선을 추구한다는 것이 절대 악을 보인다면 그게 정말 선일까?
배트맨, 브루스 웨인은 절대적인 선을 추구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사는 도시, 고담을 구하기 위해 애쓸 뿐이다. 벽돌 하나하나 빼지 않고... 그래서 악당이라 지칭되는 자와 싸우고 악당의 목적을 황폐화시킨다. 단지 그뿐이다. 배트맨 가면을 벗지 못하고 낮에는 기업 회장, 밤에는 배트맨으로 살아간다.
가면을 쓰면 사람의 성격이 조금 변하는 것 같다. 자신이 누군지 모르기에 자신이 아닌듯한 행동을 마음껏 하게 되고, 좀더 대담해지고. 그래서 악당들이 가면을 쓰는 경우가 많은 것 아닐까? 자신의 존재가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다는 이점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기에 말이다.
영화 말미에 레이첼은 브루스가 배트맨인 걸 알고 자신이 알던 옛날의 그 소년이 다시 찾아오길 바란다고 한다. 브루스가 배트맨인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레이첼이 검사이기 때문에 사법체계 안에 있지 않은 배트맨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이해한다. 약간은. 그런데 배트맨이 더이상 배트맨이 아니게 될 때, 브루스가 더이상 배트맨 가면을 쓰지 않게 된다고 해도 옛날의 그 순수한 소년이 다시 돌아올까? 사람은 누구나 변하는데? 그리고 왜 옛날의 순수한 소년이어야만 만난다는 것일까? 그게 오히려 레이첼이 성장하지 않은 것 아닐까?
옛날의 모습만을 생각하고 그 모습만을 좋아하는 것은 진정으로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어떤 모습이어도, 어떤 가면을 써도, 자신의 입장이 있더라도 좋아하면 좋아하는 것, 그 뿐이다. 그래서 레이첼이 브루스와 좋은 결말을 맺지 않은 그 결말이 좋았다. (고담시가 배트맨이 필요없는 도시가 된다고 해도 예전의 그 고담은 아닌 것과 같다)
브루스가 배트맨 가면을 쓰고, 브루스라는 낮의 모습보다 더 대담해지는 행동을 할지언정 그게 왜 브루스가 아니게 된다는 말인가? 가면을 써서 성격이 조금 변한다고 해도 그것은 브루스이고, 브루스가 가면을 써서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나쁜 짓을 한다고 해도 브루스는 브루스다).
아이언맨이 가면을 벗어서 자신을 낱낱이 드러냈다면 배트맨은 가면을 통해 자신과 배트맨이라는 거리를 두고,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싶을 뿐인데... 어느 것이 옳다, 나쁘다라고는 못할 것 같다. 거기에 유명한 정신분석학자들의 학술까지 대입해보고 싶지도 않다.
누구나 배트맨처럼 드러나는 가면을 쓰진 않더라도 우리 모두 가면을 쓰고 살아가니까. 단지 배트맨은 도시를 구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악당을 구한다. 그것일뿐.
영화 한 편을 보고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을 보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가 대단한 영화인 것은 맞는 듯!
배트맨 비긴즈의 명대사를 검색하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대사를 꼽기에 이걸 마지막으로 적고자 한다.
브루스가 듀커드가 대대로 내려오던 웨인 집안을 불태우자 낙심한다. 그런 그에게 알프레드 집사 아저씨가 말한다.
"웨인 집안은 건물이 아닙니다. 왜 떨어지는 걸까요? 덕분에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이미지는 다음 영화정보에서 발췌
제목
크리스찬베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