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바다 사이.
우연히 보게 된 책. 제목보다 4권 완결이라는 짧은 내용 때문에 고른 책이었다.
시간 때우기용. 2000년에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판된 책. 오래된 책이다. 일본에서는 그보다 더 일찍 출간되었을 거고.
그림체는 꽃보다 남자의 작가가 생각났지만, 여자 그림은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아무렴 어떠냐,라는 여러 생각들 중, 큰 관심 없는 와중에 보기 시작했다. 일본엔 비슷한 그림체의 작가들도 많더라, 라며...(후에 찾아봤더니 역시 다른 작가였다)
태평양 전쟁 때의 이야기. 전쟁이 끝나기 2년 전이라고 해야 할까. 일본도 우리와 같은 때에 패전을 했으니 45년에서 2년 전인 43년 정도의 배경이다.
과거 회상의 액자식 구성이다. 게다가 주인공이 회상하는 게 아니고, 주인공의 옆에 있던 사람이 회상한다.
전쟁에 반대하는, 나라보다 자신을 우선하라는 학교 선생인 카즈오미.
어렸을 적에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학대를 당하고 성폭행까지 당할 뻔한 소녀 미츠키.
이 둘의 이야기다.
남잔 먼 친척으로부터 소녀를 부탁 받고 자신의 재산을 남겨주기 위해 결혼을 결심한다. 전쟁을 반대해도 결국 전쟁터로 가야할 걸 알기에 얼굴 모르는 돈 없는 소녀를 위해서. 남자는 처음부터 죽을 생각을 한 것이다. 전쟁터에 가면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남자는 자기의 친한 친구 여자 친구와 관계를 가지다 친구에게 들킨다. 친구는 그 모습을 보고 뛰쳐나가다가 경찰에 끌려간다. 그는 불순분자였다. 학생 운동을 하던 불순분자. 그는 결국 잡혀간지 하루도 못 지새우고 고문으로 죽는다.
남자는 이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자기 때문에 친구가 죽었다는 자책감. 그래서 더욱 전쟁터로 가게 되면 살아 오겠다는 마음이 없다.
소녀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아내가 되어 살아갈 생각에 불안하고 떨린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어쩔 수 없이 살아왔으므로 수용하고 살아가기로 생각한다.
상처를 가진 남자와 상처를 가진 소녀가 만나고, 당연한 이끌림으로 서로 사랑하게 된다. 일생에 하나뿐인, 운명이라 말하는 그런 사랑을...
서로의 마음을 깨닫자마자 남잔 전쟁터로 끌려가고 소녀는 남자를 기다린다. 서로 그리워하는 편지를 쓰며, 힘들지 않다고, 걱정하지 말라며 서로를 위하는 하얀 거짓말의 편지들이 오가며, 남자는 소녀를 위해 살고자 하고, 소녀는 남자가 꼭 살아 돌아올 것이라며 믿고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의 집에 강제수용소에서 도망친 작은 외국인 소년이 숨어 든다. 소년은 밥을 훔쳐 먹다가 소녀를 보고는 위협을 하지만, 소녀는 결국 그 소년을 용서하고, 숨겨 주기까지 한다. 작은 소년은 일본인을 경멸하고 싫어하면서도 소녀가 성폭행당할 뻔한 순간에 소녀를 도와준다.
고향에서 평화롭게 살던 작은 소년과 소년의 누나. 누나는 고향에 갑자기 나타난 일본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끌려간다. 소년 역시 끌려와서 강제수용소에 갇혀 지냈던 것. 자신의 누나가 소녀와 닮았다며 소녀를 위험에서 지켜준 것이다. 소녀는 남자가 전쟁터에 끌려가기 전에 사준 예복을 팔아 마련한 돈을 작은 소년이 훔친 것을 알았지만, 결국 작은 소년의 손에 쥐어준다. 고향으로 돌아가 꼭 엄마를 만나라면서. 작은 소년은 소녀에게 몸에 지녔던 묵주를 준다. 행운을 줄 것이라며.
작은 소년은 떠나고 소녀는 성폭행 하려 했던 사람(카즈오미의 형이었다)이 보내 온 돈으로, 남편을 만나기 위한 긴 여행을 떠난다. 둘은 겨우 만나고 다시 영원을 맹세한다. 행운이 올 것이라며 남편에게 묵주를 주는 소녀.
전쟁을 반대하는 남편은 비국민이라며, 군대에 징집되기 전부터 마을에서 찍혔던 터라(전쟁 중인데 나라를 위해 군대에서 싸우지 않거나 나라를 위하지 않는 사람을 당시 일본에서 일컬었던 말인 듯 싶다. 특히 여자들은 화려한 옷을 입어도 안 되었다. 이런 시대 상황이 작품 곳곳에 나타나서 일본 사람들 역시 전쟁의 참혹함에 피해자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군대에서도 상관에게 계속 구타를 당한다.
필리핀 전쟁터로 간 남편은 사람을 죽이지 않으려 하고, 위안부 여잘 안지도 않는다. 오히려 위안부의 난영이라는 어떤 소녀를 도와주기까지 한다. 그것 때문에 난영은 군인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다. 남편은 자신의 상사를 위협하며 난영을 구해내지만, 결국 남편의 품에서 죽고 만다. 난영은 남편이 자신의 하나뿐이며 영원한 사랑인 아내만을 생각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 입맞춤을 원하고, 남편은 자신의 아내(소녀)를 생각하며 그 소원을 들어준다. 난영은 죽기 전에 남편의 목에 걸려 있는 묵주를 보고, 헤어진 남동생을 생각한다.
작은 소년이 소녀에게, 소녀가 남편에게 준 묵주.
전쟁의 참혹함 앞에서도 끝까지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남편은 상사에게 계속된 구타 때문에 실명의 위기까지 온다. 그럼에도 그는 사랑하는 소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살고자 한다. 특히 소녀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안 이후로는 더더욱. 살아 돌아가서 소녀와 아이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기를 희망한다. 남편의 꿈은 그것이 다였다.
둘은 끊임 없이 편지를 주고 받으며, 소녀는 남편이 필리핀 전쟁터로 가기 전 마지막을 함께 보내고 생긴 귀중한 아이를 폭탄이 터지는 혼란스런 와중에서도 무사히 낳는다. 남편을 기다리며, 소녀는 전쟁 중에 고아가 된 두 아이들도 거두어서 함께 키운다.
남편은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상사가 자결해 죽으라고 다친 자신을 버리고 간 상황에서도 죽지 않고, 아픈 몸을 이끌고 살기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다 필리핀 아이를 만나고, 말이 통하지 않는 그 아이와 함께 살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지만, 미국의 공격에 그 아이를 살리고 죽는다.
전쟁이 끝나고 아이와 함께 매일 기차역으로 나가는 소녀. 꼭 남편이 돌아올 것이라는 마음을 다잡지만 결국 소녀에게는 남편의 사망통지서가 날아든다. 소녀는 한순간 죽으려 하지만, 울고 있는 아이를 느끼고는 남편을 위해 살고자 한다. 남편의 전우가 찾아와서 남편의 마지막을 소녀에게 알려준다.
소녀는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살리고 죽은 남편의 죽음을 전해 듣고 다행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카즈오미씨"답다며(늘 "카즈오미씨"라고 불렀다)...
소녀의 주위를 맴도는 같은 학교 선생이 있지만, 소녀는 남편만을 사랑하며 평생을 혼자 살아간다. 소녀에게는 아이들이 있으니까, 남편을 그리워하며 그렇게 살아간다.
어느 날 뉴스에서 어떤 한국인이 일본인 고아원을 설립한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소녀가 듣는 것은 아니고, 배경으로 나온다. 자신을 살려준, 누나를 닮은 일본인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살아갈 수 없었다고. 일본을 그렇게 증오하던 작은 소년은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이 부분에서 뭉클했다. 이 작가는 작은 부분, 하나하나를 모두 연결해서 개연성이나 내용에 어색함이 없도록 잘 짜맞추어서 너무 좋았다)
할머니가 된 소녀는 남편과의 추억이 있는 계단에서 죽는데, 소녀의 주머니에서 남편과 죽고 받은 편지들이 나온다.
소녀는 죽은 후에야 남편을 만나고 행복하게 웃는다.
전쟁의 참혹함. 전쟁으로 미치는 사람들. 국수주의 등등. 여러 이야기가 나온다. 특히 일본인의 시각에서 다룬 태평양 전쟁, 그 안에는 일본의 정치인들이 부정하는 위안부와 일본 군인들이 다른 나라에서 어떤 짓을 했는지,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는 또 어떤 짓을 했는지 드러난다.
핵심은 소녀와 남자의 죽음을 넘나드는 사랑이지만, 그 배경은 바로 그런 역사적인 이야기들이다. 내용이 정말 탄탄하다. 만화책인데도(만화책은 내용이 조금 허술하다는 편견이 있다) 왜곡하지 않는 시대 상황과 아픔, 전쟁의 폭력과 잔혹성을 절절히 느끼게 한다. 특히 미츠키와 카즈오미의 사랑을 통해, 그것이 더욱 도드라진다.
그런데 난영과 작은 소년이 정말 한국인일까? 난영이 그리는 고향에 수수밭이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였던 시대에 수수밭을 심었던가? 수수밭은 왠지 한국보다는 중국이 더 맞는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할 때 중국이 아닌 한국이라고 바꾼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었지만... 난영이가 죽을 때 고향을 생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한복 같은 옷을 입고 환하게 웃는 장면이 있다. 중국의 전통 복장은 아니었으니까, 아마 한국이 맞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수수밭을 잘못 표현했을 수도 있고, 실제 당시에 수수밭이 많았을지도 모르고...
머,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만화를 보고 나는 먹먹함에 잠들 수가 없었다. 새벽까지 뒤척였다. 내가 겪은 적 없는 전쟁, 내가 이런 전쟁을 겪지 않아서 오는 안도감,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는 불안감, 페이지가 끝날 때까지 남편이 살아돌아오길 바랐지만 오지 않은 배신감 등이 뒤엉켜서...
첫 장면이 꽃을 들고 계단을 오르는 할머니(소녀)를 보고 어떤 노인이 회상하는 장면이다. 그 노인은 소녀가 키운 소년이다. 남편이 가르쳤던 학생 중 하나. 보는 내내, 남편이 소녀 곁으로 돌아왔을 거야, 돌아와서 소녀보다 조금 일찍 죽은 것일 거야, 라고 바라고 바랐었다. 특히 4권의 표지 그림 때문에 더욱 그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위의 표지를 보면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ㅠㅠ
이런 먹먹함이 느껴지는, 나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이런 마음이 느껴지는 새드엔딩, 너무 싫다. 마음 속에 왜인지 알 수 없는 돌 하나가 얹혀진 느낌. 분명 수작이라고 생각하지만, 만화니까, 만화이기에 남편을 살려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볼 수 없는 만화가 되었다. 그렇지만 못 본 사람들은 꼭 보았으면 좋겠다. 절판이라 너무 안타깝다.
사랑은 여러 가지가 있고 평생 하나뿐인 사람도 있다.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평생의 사랑을 만나서, 함께한 기간이 너무 짧았음에도 소녀는 행복했을까?
대사도 예쁘고, 그림도 예쁘다. 오래된 만화지만, 내용은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다거나 이상하다거나 하지 않다. 두 주인공의 얘기뿐만이 아니더라도 전쟁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좋은 내용은 많은 시간이 흘러도 좋은 내용이다. 시간에 상관 없이.
제목
하늘과바다사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