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s24에서 이미지 발췌
대학 때, 아마 리포트 때문에 읽어야 했던 책이 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을 것이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던 이 책을, 나는 읽기 전부터 투덜투덜대며 리포트 기한 막바지까지 가방 안에만 넣고 다녔다. 계속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생각과 몸이 자꾸 따로 놀았더랬다.
결국 리포트 기한이 며칠 내로 다가오고, 나는 부리나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마 이 책의 처음 몇 장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 거다. 니체가 어쩌고, 영혼이 어쩌고... 첫 몇 장에 지루함을 느낀(그땐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속절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닥치니 한다는 말이 맞는지, 꾸역꾸역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니체 어쩌고 써 있던 몇 장을 넘긴 후부터,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간결한 문체와 빠른 전개. 어느 순간 책에 푹 빠진 것을 느낀 것도 누군가의 방해로 책 읽기가 멈춰진 때였다. 생각 외로 재미있었고, 독특했고, 무엇보다 접하지 못한 사랑이야기였기에 흥미 있었다. 생각하지 못했던 책에 대한 놀람은 리포트로까지 영향을 미쳐 한 페이지 겨우 쓰면 많이 쓴 거겠니, 걱정하던 것과 달리 몇 페이지에 걸쳐 작성할 수 있었다. 당연히 리포트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ㅋㅋ -_-;;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책의 내용을 깊이 이해하기에는 어린 나이지 않았을까? 배경이 체코의 "프라하의 봄"이라는 것도 몰랐을 거고, 알아내려 하지도 않았을 거고, 그냥 남녀의 사랑 이야기라는 것에 더 공감과 재미를 느꼈으리라.
내가 갑자기 이 책이 생각난 이유는 열심히 보던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 한 말 때문이었다.
"한 번은 너무 진지해서 놓쳤고, 한 번은 너무 가벼워서 놓쳤어. 이제는 둘 다 할 거야." 아주 정확한 대사는 아니겠지만, 이와 비슷한 내용을 말했고, 나는 저 말 어디서 들었더라?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이 책이 번뜩 생각난 것. 십여 년이 훨씬 넘는 동안 잊고 살았던(물론 이 책이 워낙 유명하니 제목은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고, 나 역시 이 책의 제목을-꼭 책의 제목으로서의 기능이 아니라-대화 중에 많이 했었지만... 내용은 생각하지 않았다) 이 책의 내용이 단편적이기는 하나 기억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드라마의 작가가 이 책을 읽고 영감을 얻어서 썼을리는 없을 것 같지만(머 아닐 수도 있지만~), 나는 그 대사에 자동 반사적으로(한참 생각하긴 했지만) 이 책이 생각났다. 생각의 연결고리가 어색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그랬으니까.
이 책의 배경은 체코슬로바키아다. 동유럽, 소련의 공산주의 영향을 받던 나라. 처음에는 그런 부분을 느끼지 못하지만 내용이 전개되어 가면서 공산주의 세계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느낌을 받는다. 물론 당시에는 소설적 장치 정도로만 생각하고 말았지만... 처음 읽을 때, 좀더 배경에 대해 찾아보면서 제대로 읽을걸, 후회가 된다.
1968년, 체코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기를 "프라하의 봄"이라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주의 영향을 받던 동유럽들은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나 민주적인 선거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서 국민들의 불만이 점점 높아졌었고, 4월에 드디어 사전검열제 폐지, 민주적인 선거법제도의 창설,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 보장 등이 채택되었다. 말 그대로 "프라하의 봄"이 시기와 더불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8월, 체코에서 일어난 이 일이 동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한 소련군이 체크슬로바키아를 침공하여 개혁파 지도자들을 소련으로 연행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마치 전쟁터가 된 듯한 프라하가 되어버린 것. 이로써 프라하의 봄은 끝이 난다. 짧디 짧은 봄. 체코 사태라고도 한다.
책의 배경인 "프라하의 봄"은 책 중반에서 종반부에 나온다. 그러니 그 전에는 민주적이지 못한 억압을 받는 나라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읽으면 된다.
토마시와 테레자가 이 책의 주인공이다. 이들과 함께 프란츠와 사비나도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데, 굳이 나누자면 주인공이라기 보다는 비중이 굉장히 높은 조연? 주연보다는 조금 낮은 서브 주연? 머 그렇게 되시겠다. 어쨌든, 토마시는 외과 의사로 무척 가벼운 관계를 지향한다. 여자와의 무겁고 진지한, 구속하는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테레자는 다르다. 우연한 만남을 시작으로 운명적 사랑을 느낀 두 사람. 토마시는 자신의 가벼운 관계 지향에서 테레자와 함께 사는 관계로까지(여자와 함께 자는 것도 하지 않았던 그로서는 변했다고 할 수 있는!) 발전하지만, 여전히 다른 여자와의 가벼운 관계를 이어나간다.
이와 반대로 테레자는 무척 진지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자신 외의 다른 여자들과 자꾸만 관계를 맺는 토마시를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계속 싸운다. 그러던 와중에 "프라하의 봄"이 끝나고 엉망이 된 프라하를 피해 스위스로 둘은 떠난다. 다른 곳으로 가면 토마시의 가벼운 행동, 관계들도 없어질 것이라 여겼지만 스위스에서도 여전한 토마시. 결국 테레자는 토마시의 행동을 참지 못하고 다시 프라하로 간다. 토마시는 테레자를 쫓아 자유가 없는 그곳으로 갈지, 아니면 자유로운 스위스에 남을지 고민한다(실제적 자유. 국가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결국 테레자를 쫓아 간 토마시. 이들의 이 질긴 사랑? 연애? 인연?은 종반부에 새로운 방향으로 선회하고, 좋은 분위기가 연출되는 듯하나 사고로 둘이 함께 죽고 만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결말. 내가 가장 싫어하는 새드엔딩인데도 왠지 허무하다거나 너무 슬프다기보다는 이런 결말이어서 조금 아쉽지만 나쁘지 않아,라는 생각이 더 먼저 들었던 결말. 두 사람 중 특히 테레자는 늘 토마시 때문에 마음 아프다가 봄이 오나 싶었던 때에 죽게 되어 안타까웠지만, 둘이 함께 죽는다는 설정이 그 안타까움을 상쇄시켰다. 둘 중의 한 명만 죽였더라면 나는 이 책을 다신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 개인적인 가치관이나 생각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누군가가 남겨지지 않고 같이 생을 마감한다는 것은 축복이지 않을까?
앞에서 언급한 프란츠와 사비나. 이 둘은 어떤 관계냐 하면, 사비나는 토마시의 가벼운 관계 대상, 즉 애인이다. 프란츠는 사비나의 또 다른 애인이고. 한 마디로 이 책에서 가장 가벼운 인물은 사비나라고 할 수 있다. 예술가인 사비나는 무거운 관계를 딱! 싫어한다. 토마시에게 진지한 상대가 생겼음에도 집착한다거나 구질구질하게 관계를 만들지 않는 한은 토마시와 계속 그런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프란츠 역시 마찬가지. 부인이 있는 프란츠는 사비나와 만날 때 휴일에만,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란 철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결국 부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사비나에게로 향하지만 사비나는 그런 프란츠를 받아주지 않는다. 다시 부인에게 가는 프란츠.
솔직히 이 둘의 관계는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두 주인공보다는 설렁설렁 책을 넘겼던 것 같다. 그래서 이 둘의 관계가 정확히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부인에게 간 프란츠로 둘의 관계가 정리가 되었던 것인지 다시 프란츠가 체코를 떠난 사비나를 쫓아갔는지... -_-;; 정말 진지한, 무거운 프란츠가 자신에게 없는 너무나 가벼운 사비나에게 빠졌던 것은 이해가 가지만, 결국 사비나와 함께 하기를 원했다는 건 그 역시 가벼움보다는 무거움을 더 삶의 지향점으로 삼았던 것 같다.
원래 사랑은 무거운 것 아니던가? 토마시 역시 마찬가지. 가벼움만을 추구하는 그가 테레자와 사랑에 빠지고, 자신의 행동들을 그만두지 못하더라도 결국은 테레자를 원하는 것을 보면 그도 내밀한, 그 깊은 의식 속에는 무거움을 추구했던 것 아닐까? 토마시에게 상처 받고, 가벼워지려 한 테레자 역시 결국 다시 토마시에게 향한 것을 보면 마찬가지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 책의 이 탁월한 제목. 내용을 아주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게 요약한 이 제목. 이 제목은 테레자가 토마시를 향한 마음이었을 수도 있고, 후반부의 토마시가 테레자를 향한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프란츠와 사비나에게도 해당할 테고...
또한 참을 수 없다는 것 자체가 가벼움 보다는 무거움을 뜻하는 것 아닐까? 가벼운 무엇인가, 가벼운 상대, 가벼운 존재에게 참을 수 없는 감정이 치솟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이 제목의 역설이 의미하는 것은, 무거움과 가벼움 이 두 가지 모두가 아닐까 싶다. 무거운 채로만, 가벼운 채로만 사람은 살아갈 수 없으니까.
그것은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나라의 운명 역시 이에 해당하지 않을까? 나라, 국가라는 그 무거운 존재가 어떻게 보면 한낱 힘의 논리에 의해 너무나 쉽게 다시 무너진 것은 또 너무 가볍다는 역설. 가볍기에 참을 수 없을 수도...(위와 정반대의 말이라고?! 그런가? ㅋㅋㅋㅋ) 참을 수 없을 정도의 무거운 존재가 실상은 가볍다. 이 아이러니. 가볍건 무겁건 관계 지향적인 사람들에게
"당신의 참을 수 없는 존재는 무엇이고 그것은 가볍습니까, 무겁습니까"라고 물어보고 싶다.
사랑의 지독한 이야기 같은 이 책, 정말 강추하는 책이다. 드라마를 통해 새삼 이 책을 다시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다. 가볍지 않은 가벼운 책, 밀란 쿤데라는 최고의 작가다.
제목
가벼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