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영웅'을 희구(希求)한다. 엄청난 능력을 발휘해 고난과 역경을 뚫어내고 마는, 그래서 우리들의 척박한 삶을 한순간에 뒤바꿔줄 영웅 말이다. 백성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고, 진심으로 아파하는 영웅들이 펼치는 인상적인 스토리에 사람들은 열광하고 환호한다. 영웅을 소재로 한 역사 드라마가 히트를 치는 건, 영웅의 출현에 척박한 삶에 주눅들어 있던 사람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이다.
'주몽'이나 '불멸의 이순신' 같은 역사 드라마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한편, 역사 드라마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가 그 대표적인 예다. 물론 이성계, 이방원, 정도전이라는 영웅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긴 하지만, 분이, 무휼, 이방지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역사'라는 것이 비단 '영웅'들만의 몫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해고 노동자 진상필의 성공 신화를 다뤘던 KBS 드라마 '어셈블리'는 방송에서는 '금기'와도 같았던 '노동운동'을 다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역시 '영웅'의 등장과 활약에만 초점을 맞춘 접근 방식은 아쉽기만 했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 잠깐의 카타르시스를 맛볼 수는 있겠지만, 해고 노동자 진상필이 국회의원이 되어 국회를 뒤집어 놓는 일이 현실에선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현실'을 바꾸는 과정은 그보다 훨씬 더 지루하고 끔찍하다. 그리고 변화의 성패는 단 한 명의 영웅에 달려 있지 않다.
역사 드라마에서 '육룡이 나르샤'와 같은 관점의 변화가 포착되고 있는 것처럼, 노동자의 삶을 다루고 있는 드라마에서도 이와 같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바로 그 주인공이 JTBC 드라마 '송곳'이다. 이 드라마는 대놓고 노골적이다. 아예 '노동조합'을 만들라고 말한다. '연대'를 강조한다. 그래야 우리들의 삶을 바꿀 수 있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달콤한 꿀'만 발라 놓지 않는다. 그릇된 환상을 통해 사람들을 꾀지 않는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더욱 솔직하고, 더욱 처절하다. '송곳' 같은 인간인 구고신(안내상)은 노동운동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듬직한 존재이다. 지난 5화에서는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 있어서 언제나 확신에 차 있는 그가 매일마다 얼마나 큰 두려움과 맞서 싸우는지 그려졌다.
"가만 두면 모래성처럼 조용히 쓸려나갈 사람들을 왜 괜히 뭉쳐놔서 부서지게 만"드냐는 한탄서린 외침에 구고신은 말없이 그리고 고통스럽게 눈물을 흘린다. 똑똑하고 말도 잘 하는데 왜 이러고 있냐는 질문에 "잘 봤네. 진짜 힘든 사람들한테 당신들이 희생하면 좋은 세상 올 거다. 조금만 더 견디면 같이 잘 살게 될 거다. 결국 바뀌는 건 개뿔도 없는데. 이게 사기지 뭐야"라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물론 그는 "자아, 그럼 열심히 한번 해봅시다!"라며 매번 쓰러진 자신을 일으켜세운다. 그 모습이 딱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면 '송곳'도 기존의 역사 드라마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송곳'이 특별한 건, 바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쯤 뚫고 나오'는 '송곳' 같은 인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너도나도 '송곳'이 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송곳'도 '송곳'으로 묘사되는 노동 연구소 소장 구고신과 푸르미 마트의 중간 관리자인 과장 이수인(지현우) 두 사람을 축으로 한다.
하지만 부당하게 해고를 당할 뻔한 황준철 주임(예성)이나 그 밖에 푸르미 마트에서 일하고 있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주체가 된다. 애초에 '송곳'일 수밖에 없던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그보다는 그런 '송곳'을 중심으로 뭉치는 사람들이 훨씬 많고, '송곳'이 계속해서 '송곳'일 수 있게 만드는 다수의 사람들의 힘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기초가 되지 않던가?
지난 5회에서 무엇보다 좋았던 부분은 드라마의 두 축인 구고신과 이수인의 관점을 벗어나 문소진(김가은)의 이야기가 문소진의 입을 통해 들려졌던 부분이다. 문소진의 고백은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라는 책의 논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왜 노동자들이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노조를 설립하거나 가입하지 않고 기피하는지, 동료들의 눈물에 공감하기보다 회사의 입장에 보다 호의적인지 말이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뭘 해야할지 뭘 하고 싶은지는 몰랐지만, 뭐든 그걸 찾기만 하면 잘될 수 있을 거라고 낙관했다. 뭐든 열심히 할 자신도 있고, 이런저런 유혹들에 귀가 팔랑거릴 만큼 멍청이도 아니고, 무엇보다 나름 예쁜 편이니까.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을 것을 찾기 위해서는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고, 시간을 사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무표정했고, 피곤했고, 불친절했다. 상관없었다. 난 여기에 오래 머물지 않을 테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나는 달라'라고 끊임없이 되내는 것처럼,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자신의 처지에 동일시하기보다는 '난 여기에 오래 머물지 않을 테니까'라고 외면한다. 그리고 사회와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기득권의 목소리에 동조한다. "그거야 남들이 열심히 할 때 열심히 안 한 자기 탓이지"라며 스스로를 더욱 채찍질한다. 마치 그렇게 하면 이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나도 우리 회사 마음에 안 들고 불법도 저지른다는 거 알겠는데, 솔직히 이런 데만 이런 거 아니잖아요. 이런 데는 그냥 인생의 정류장 같은 거잖아요. 꿈을 이루기 위해서 잠시 머무는 것뿐인데, 이렇게 안달복달할 필요 있나."
"정류장? 여기가 삶의 종착지인 사람은 어쩔건데. 이곳을 벗어나야 할 함정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야 할 터전이야."
"경쟁에서 진 걸 어떡해요. 다 본인 책임이지"
"패배는 죄가 아니야. 우리는 벌을 받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고. 우린 달리기를 하는 게 아니고 삶을 사는 거고, 우린 패배하는 게 아니고 단지 평범한 거라고. 우리의 국가는 우리 정치 공동체는 평범함을 벌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문소진은 구고신의 강의에 계속해서 딴지를 건다. 그는 이해하고 싶지 않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해 들으면서도 "왜 저렇게 과장을 한데. 왜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들지 못해 안달을 하지"라며 고개를 내젓는다. 하지만 이내 회사로부터 해고 통지 문자가 도착한 후에야 그것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부자에게 투표하는 가난한 사람'이었던 문소진이 달라지는 계기는 결국 현실을 뼈저리게 경험하는 것이었다.
'영웅'의 입장에서 혹은 '각성'한 기득권의 입장에서 '측은지심'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평범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송곳'은 특별하다. 하지만 그만큼 이 드라마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영웅을 내세워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면, 시청자들은 잠시나마 기쁜 마음을 갖지 않겠는가? 하지만 현실이 그러하지 않다는 건 서두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우리 모두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런 식으로는 이 세상의 지배 논리에 흠집조차 낼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헛된 희망'을 안기는 '사기'가 아니겠는가?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변화해야 한다. 노조를 만드는 등 연대를 통해 적극적으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분명 '송곳'은 노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조금이나마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연대'가 곧 장밋빛을 의미하진 않는다. "가만 두면 모래성처럼 조용히 쓸려나갈 사람들을 왜 괜히 뭉쳐놔서 부서지게 만드냐"는 절규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푸르미 마트의 노동자들이 거둔 잠깐의 승리가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회사의 반격이 본격화되는 6화는 전초전에 불과하다. 앞으로 푸르미 마트의 노동자들이 겪어야 할 고통은 상상 그 이상일 것이다.
협박과 회유는 더욱 노골화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연대'는 힘없이 분열하고 부서질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송곳'은 그 과정을 있는 그대로 담아낼 것이다. 아무리 드라마라고 하더라도, 그 과정들을 날 것 그대로 지켜보는 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송곳'을 외면해선 안 된다. 이 드라마가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명확하지 않은가? 그것이 곧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 말이다.
우리의 이야기를 우리가 외면해서야 되겠는가? "자아, 그럼 열심히 한번 해봅시다!"라는 구고신의 다짐처럼 우리도 다시 힘을 내보자. 우리가 모두 반드시 '송곳'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날카로운 '송곳'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손잡이'가 돼도 좋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함께' 한다는 것, 따뜻한 '연대'의 힘을 깨달아가는 것이다.
글 제공 : '버락킴' 그리고 '너의길을가라'의 블로그 (
http://wanderingpoet.tistory.com)
* 본문의 내용은 애니포스트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